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렉산데르 6세 (문단 편집) === 교황 === 교황이 된 뒤에는 다른 추기경들의 퇴임 압박을 받았고, [[뇌물]] 증여가 대중에 알려져 큰 비난을 받았기에 위치가 위태로웠다. 그 때문인지 교황으로서 인정을 받기 위해 상당히 고생을 많이 했다. 특히 교황청의 재정을 아끼기 위해 검소한 생활을 하고, 법을 준수하는 등 이전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으나, 한편으론 자신의 아들인 [[체자레 보르자]]를 16살 때 [[대주교]], 얼마 후 [[추기경]]으로 만드는가 하면, 친인척을 요직에 앉혀 자신의 권력을 돈독히 하기도 했다.[* 실제로, 체사레를 후임 교황으로 앉히려 했다는 추측은 충분히 설득력을 가진다. 교황직을 이용해 무언가 큰 일을 해보려던 알렉산데르 6세의 입장에서 자신의 뒤를 이은 교황이 보르자 가문에 우호적인 사람. 아니, 아예 보르자 가문의 사람일 경우의 유리함을 모르지 않을 터였으므로. 실제로도, 보르자 가문은 보르자에 적대적인 교황 [[율리오 2세]]에 의해 몰락하고 말았다. 한편 교회법상으로 보면 사생아는 교회의 최고직에 세우지 못하도록 규정되어 있으며, 실제로 체사레 보르자의 경우가 이례적인 것이지만 결국 [[추기경]]직까지 한계였다. 체사레는 이후 교황군 총사령관이자 간디아 공작이었던 형제 후안 보르자가 의문사를 당하면서 망설임없이 추기경 자리를 박차고 [[환속]]해, 발랑스 공작이 되었다.] 대외적으로는 [[나폴리]]의 아라곤 왕가에 딸 [[루크레치아 보르자]]를 혼인시켜 관계를 개선시키고, 떠오르는 [[오스만 제국]]의 위협에는 회유적으로 대처해 불가침에 가까운 상황을 유지했다. 1494년에 프랑스 왕 [[샤를 8세]]가 나폴리 왕위 계승권과 알렉산데르 폐위[* 알렉산데르 6세의 최대 라이벌이자 훗날 [[율리우스 2세]]로 즉위하는 추기경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가, 교황 선거 직후 프랑스로 망명했었기 때문이다. 샤를 8세의 원정 당시 직접 길잡이가 되어 함께 이탈리아를 침공했다.]를 주장하며 이탈리아를 침공했을 때는 그와 직접 담판을 벌여 로마를 그냥 통과하게 했으며 그가 데리고 간 [[젬 술탄]] 암살에도 성공한다. 이윽고 [[신성 로마 제국]]과 [[베네치아 공화국]] 등 이탈리아의 여러 [[도시국가]]들과 동맹을 맺어 프랑스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. 그런가 하면 교회 [[개혁]]을 주장하는 [[피렌체]]의 [[지롤라모 사보나롤라]]의 위협을 받기도 했는데, 초기에는 사보나롤라가 피렌체의 전권을 장악하고 [[사치]]를 반대하는 [[분서]]사건을 저지르며 점점 세력을 넓히고 있었다. 그런데, 사보나롤라의 제자가 '''불을 통한 재판'''(불의 심판)[* 즉, 정의로운 사람이라면 '''하느님이 보호해 줄테니 불을 붙여도 타죽지 않을 것이다'''라는 식의 재판이다. [[마녀사냥]]할 때의 바로 그것이다. 불 위를 걷는 거라 특수한 발바닥을 가진 생존자가 조금은 있었다.]에 응해버리는 바람에 난처해진 사보나롤라는 재판장에 나서지 않았고, 이것을 사보나롤라가 뒤가 구리다고 받아들인 [[피렌체]] 민중에 의해 '''폭동이 일어나''' [[교수형]] + [[화형]]에 처해버렸다. 이로써 알렉산데르 6세는 위기를 다시 넘긴다. [[마르틴 루터]]를 만난 [[레오 10세]]에 비하면 시절이 좋았다.[* [[니콜로 마키아벨리]]는《[[군주론]]》에서 사보나롤라를 평가하여, '''"[[무기]]를 갖지 않은 [[예언자]]는 자멸한다."'''라는 말을 남겼다. 즉, 민중에게 언제까지나 자신의 말이나 자신이 세운 법을 지키도록 강제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기 때문에, 일단 민중이 자신의 말을 믿지 않게 되자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.] 그 후에는 또 다른 아들이자 교황군 총사령관이었던 후안 보르자가 의문사를 당한 후, 아들 [[체사레 보르자]]를 [[환속]]시켜 [[프랑스 왕국|프랑스]]의 속국이었던 [[나바라 왕국|나바라]]의 공주와 혼인시키고, 프랑스의 발랑스 공작으로 삼아 [[이탈리아]] 중부 [[교황령]]에서 반(半) 독립 상태로 할거하던 여러 군주국들을 평정하고, '''[[보르자 가문|보르자 집안]]이 다스리는 통일 로마냐 왕국을 세우려고 했다.'''[* 본 항목에는 간략하게 서술되었지만, 알렉산데르 6세 최대의 업적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. 당시 이탈리아는 여러 [[도시국가]]들로 분열된 틈을 노린 [[프랑스 왕국]], [[신성 로마 제국]], [[스페인]] 왕국 등이 [[이탈리아 전쟁|땅따먹기]]를 벌이고 있었는데, 알렉산데르 6세는 [[이탈리아]]를 '''로마냐 왕국'''으로 통일시켜 땅따먹기를 끝내려 했던 것이다. 이 경우 [[교황령]]은 오늘날의 [[바티칸 시국]]과 마찬가지로 종교만을 담당하게 되며, 교황령 1,000년 역사상 스스로 세속 권력을 포기하려 했던 교황은 알렉산데르 6세가 '''유일하다.'''] 세속 군주로서의 업적 외에 기독교의 최고 수장으로서의 업적[* 상술한 바와 같이, 교황령이라는 나라가 존속했을 때의 교황은 똑같이 '''교황'''이라고 하지만 오늘날의 교황과 동일시해서는 곤란하다.]도 있는데, 예술을 적극적으로 후원했으며 외교적인 성과 또한 거두었다. 또한 신생 스페인 왕국에서 교회의 이름으로 하는 종교재판을 빌미로 [[유대인]]들을 박해하는 것을 금지했으며 본인도 [[스페인]]과 [[포르투갈]]에서 쫓겨난 유대인들을 직접 환영해주며 교황령에 받아들여주기도 했다.[* [[레콩키스타]]의 후폭풍으로 [[이슬람]] 왕조 때, 부를 축적한 유대인 사냥에 열을 올렸는데, 잘하면 전 재산 몰수 후 강제 추방이었고, "[[개종]]이냐? [[화형]]이냐?" 선택을 강요당하던가, 심하면 그냥 선택의 여지 없이 태워죽였다.] 그러나 [[이탈리아인]]들에게 '''스페인 교황''' 소리를 들었던 그를 고향인 스페인에선 이를 비아냥 거려 '''유대인 교황'''이라고 씹었다고. 성직자로서는 문제가 많았지만 차라리 세속 군주나 황제였다면 정치력으로서 확실한 [[명군]]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